
안산 정상은 까마득한 절벽이다. 나는 이 절벽에 3미터도 다가서지 못했다. 그 절벽을 앞에 두고 자그마한 꽃들이 피어있다. 누가 심어 놓은 것처럼. 나는 오직 이런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도 험한 산을 열시간도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1. 한계산성 릿지
릿지 등반은 말 그대로 암릉 등반이다. 한계산성 릿지는 고정로프가 많이 설치되어 굳이 장비를 차고 등반하지 않아도 되지만 제대로 된 암릉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한계산성 릿지에서 보았던 풍경이 지금까지 살면서 해온 산행 중에 가장 절경이었다. 가장 좋았던 산행은 08년 OB하계에서 맛보았던 십이선녀탕에서 대승폭포를 지나는 산행이었는데 이는 내가 생명력 넘치는 물의 흐름을 듣고 느끼는 것을 좋아하는 까닭이지 절경은 한계산성 릿지에서 보았던 광경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그만큼 중간중간 무서운 곳도 많았다. 나는 지금도 아파트 4층만 넘어가면 베란다에서 고개도 내밀지 못한다. 그러니 한계산성 릿지의 침봉에서 내려다 보이는 저 아래께와 그것을 지나는 아슬아슬한 등반은 지금도 살이 떨린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릿지등반에서 보는 경치가 가장 끝내 준다. 솟아있는 암릉의 바위들에 올라서면 절경을 방해하는 그 무엇도 없기 때문이다. 고소감이 무섭더라도 이러한 경치들을 볼 수 있는 등반이라면 안전장비를 갖춘 전제하에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다음에는 한편의 시를 위한 길 릿지를 해보고 싶다.
릿지가 끝나고 이제 서북주능에 올라탔다고 수홍형께서 이야기 해 주셨다. 그리고 안산에 들렀다. 아, 이런 걸 볼 수 있다니.. 때로 취미로 시를 쓰는데 나는 나무에 대해서, 버섯에 대해서 시를 쓸 수는 있어도 산에 대해서는 시를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고 그저 그런 사물로써 지나가는 것들에게 언어로 숨결을 부여하는 기적이 시라면, 산은 그 대상이 될 수 없다. 각자의 자락을 가지고 자신의 방향으로 뻗어있는 생명 덩어리는 그 자체로서 의미로 가득차 있다.
절벽 끝에 핀 꽃들도 마찬가지다. 이 꽃이 나에게 어떤 영감을 주는 지 언어로서 표현하는 것은 실례가 된다. 한동안 감동에 정신이 먹먹하다. 이 꽃들은 평소에 술취한 아저씨들 오줌을 먹고 자라는 시멘트 틈 사이에 피는 민들레와는 다르다. 누구라도 이 꽃들을 가만히 보면 사소하지 않은 꽃들을 대면하는 사소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고소공포증 때문에 내내 안산 정상에 주저앉아서만 풍경을 구경하고 일어서서 몽유도원도 밑자락까지 둘러보지 못한 것은 아쉽다.
중간에 동굴 같은 길목에서 기석형과 수홍형께서 벌에 쏘이신 것은 정말 무서웠던 비하인드 스토리다. 나는 꿀벌에게 물려본 적이 있는데 너무 아팠다. 하지만 오히려 물려봐서인지 꿀벌은 무섭지 않다. 그렇지만 땅벌이나 쌍살벌, 말벌 등은 그래서 엄청난 무서움을 가지고 있다. 꿀벌이 이정도인데 그네들은 얼마나 아플까. 난 강의를 받다 장수말벌이 강의실에 들어오면 그대로 강의실을 나가버린다. 그 상황에 강의실에 들어앉아 있는 것은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이 날은 두려울 기세도 없이 수홍형 몸에 붙은 벌을 털어내기에 바빴다. 역시 사람은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장수 말벌은 무섭지만 어머니와 여자친구가 위험하다면 벌집을 발로 차는 위험도 감수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수 많은 꽃들과 식물들, 혼자서 수원 근교 광교산을 거닐 때 항상 지나치던 꽃들이 좋아 식물도감을 펴고 상병말 때 나름 열심히 공부했으나 사진과 바람에 흔들리는 숨결은 매칭하기가 너무 어려워 그만두었다. 떡갈나무와 갈참나무, 굴참나무를 구분할 수 있는 정도일 뿐이다. 나는 이날 7종류의 꽃과 수많은 나무들을 보았다. 이것들의 각각 다른 이름들을 알 수 있다면 좀 더 즐길 수 있을 터인데 아쉽다.
내려오는 길, 설악산은 계곡이 많아 좋다. 나는 물소리가 참으로 좋다. 내 생명력도 강해지는 느낌이다. 비록 험한 길이 많았지만 설악에 오면 항상 천불동이든 복숭아 탕이든 대승폭이든, 세차게 떨어지는 생명력이 치유해 주는 것 같아 좋다. 왜 굳이 설악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2. 몽유도원도 릿지.
08년도 하계 당시 실패했던 곳이다. 원인은 내가 입었던 군용 고어텍스였다. 필름이 다 망가졌는지 방수의 기능을 전혀하지 못했고 그 덕에 나는 너무 추웠다. 동계 산행을 몇 번 겪어봤지만 동계 때보다 그 당시가 더 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체온보다 낮은 온도의 물이 끊임없이 나의 몸을 씻고 내려가던 안 좋은 추억이다. 그곳에 다시 왔다. 너무도 좋은 날씨에. 다만 전날 술을 조금 과도하게 마셨는지 속이 쓰리고 다리가 후들거려 내 몸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
어프로치를 끝내고 1피치에 앞서 장비를 착용하는데 가스가 몰려온다. 주걱봉까지 보이던 시야가 순식간에 10미터 앞으로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산은 참 좋지만 무서운 곳이다. 바람을 타고 몰려온 가스에 나무들이 흔들린다. 습기를 온 줄기에 머금으며 차분하게 흔들리는 나무들은 평온해 보인다. 인간들에게는 때로 안전을 위협하기에 듣기에도 무서운 가스라고 부르지만 나무들은 무엇이라 부를까. 촉촉한 물기가 온 산을 훑고 가니 해가 비친다. 산불에 모든 것이 타버려도 끝내는 숲이 더 생장하는 거름이 되니 가스든 땡볕이든 태풍이든 산불이든 그 모든 것은 재난을 가장한 축복일지 모를 일이다.
이번 릿지의 포인트는 끊임없는 안자일렌, 자일웍이었다. 길이 몇 구간을 제외하고는 쉽다 보니 한 사람 한 사람 확보보며 오른다기 보다는 안자일렌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로프가 엉키지 않고 앞 뒤 등반자의 거리에 맞추어 자일을 사렸다가 푸는 과정이 중요하다. 오랜만의 릿지에 나는 처음에 이것을 버벅댔다. 클라이밍 다운 구간이 있었는데 다리가 후들거린데다 조금 높아서 나를 믿지 못하겠던 나는 내 뒤에 있던 로프를 픽스에 하강했는데 하강 준비에 시간을 지체한 것이 신경쓰여 급하게 행동하다가 자일을 엉키게 했다. 숨은벽 릿지가 쉬워 등반성이 없다고 생각한 어리석은 나의 마음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정말로 어려운 등반은 난이도 높은 바위가 아니라 길게 이어진 릿지일 수도 있다. 걸어가는 구간도 위험도에 따라서 안자일렌이나 비너통과, 혹은 아예 로프를 사려버리고 개별적으로 걸어가는 것을 정해야 하는 등, 확보의 안정성과 등반 속도를 잘 조절해야 하는 것이 릿지 등반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는데, 다시 상기해 보니 정말로 쉽지가 않다.
6피치 쯤이었나, 속도 문제로 몸자 빌레이를 해야할 상황이 있었다. 몸자 빌레이 보는 곳이 고도감이 심해서 일어서서 빌레이를 보기가 힘들어 앉아서 먼곳을 보며 기원형의 몸무게를 느끼며 빌레이를 봤다. 어디에도 자기확보가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기원형이 실수하셔서 추락이라도 했을 경우에는 나도 위험하다는 측면이 두려웠다. 고소감은 그냥 공포지만 이것은 위험, 하지만 멀리를 보고 확보하니 침착하게 잘 된다. 인간이라는 것은 참 알 수 없는 동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5.7이 너무 어렵다. 볼더링은 11급 선배들이랑 놀고 외벽은 10급에서 깐죽거리지만 인수나 설악의 화강암 코스만 붙으면 힘들고 어렵다. 기준이 무엇인지 지금도 헷갈린다. 그냥 나에게 쉬운곳, 어려운 곳만 있는 것은 아닌 지, 하는 생각이 든다. 15급 클라이머 샤마도 한국 거룡길 오면 스텝도 제대로 못밟는 것이 클라이밍이다.
3. 혜석형과의 귀가
혜석형과의 귀가는 또 다른 의미의 등반이었다. 혜석이형께서 부실까지 태워다 주셨다. 그 전에 어디 가보고 싶은 곳 없냐고 물으시길래 형과 함께 설악산을 둘러보고 싶다고 했다. 분명 혜석이형께라면 많은 것들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나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잠시 미시령에 들려 민성이와 사진도 찍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것인지 폐쇄된 휴게소에서 국립공원 직원이 와서 지키고 있었다.
혜석이형의 말씀을 들으며 생각해보니 산은 단순히 체력이 좋고 바위를 잘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소한 진리를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다. 내려가는 길에서 수홍형에게는 잘 보이던 길이 나에게는 잘 안보이던 문제, 군대 외박나와서 혼자 용문산에 갔을 때 의외로 험한 산길과 찾기 힘든 길에 당황했던 내가 ‘의외로 개떡 같은 산’이라며 내려왔던 어리석음을 상기할 수 있었다. 산의 기상을 보고, 지형을 보고 여러 흔적들을 보는 일, 모든 예민함들이 산에서 필요하고 습관화 되어야 한다. 나는 등반을 배우되 산을 배우는 것을 등한시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독도는 자신 있으나 길을 찾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기상예보를 보고 조심을 할 수는 있으나 변덕스러운 산 날씨에서 판단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앞으로는 산을 배우는 데에 더욱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벽등반부가 아닌 산악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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