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8-21 22:11
신들의 신
 글쓴이 : rlaghdrl
조회 : 1,323  

제 목 : 신들의 신  

눈물을 보이시며

33년 전 내 젊은 날, 군에서 전역한 다음해 ’81년 2월이다. 대학시절 활동한 모교 산악부의 OB회에서 추진하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남봉 원정대원으로 선정되었다. 그해는 우리 히말라야 원정대를 포함하여 모두 네 팀에 의해 해외원정이 예정되어 있었다. 단군 이래 가장 많은 해외원정대가 나가는 해였다. 8월에 우리 원정대가 출발하기 전까지 안데스 아콩카구아 팀, 알프스 아이거북벽 팀 그리고 카라코람 바인타블락2봉 팀의 원정이 모두 희생자를 내면서 돌아와 이 비극적인 등반 이야기들이 온 나라에 회자되었다. 신문 방송은 연일 이 드라마틱한 슬픈 이야기를 앞 다투어 다루었다.   

나의 고교시절 어느 날, 어머니는 북한산 인수봉에서 암벽 등반하는 내 사진을 보시고 크게 놀라셨다. 어머니는 그 날부터 신문 방송이 제공하는 비극적인 산 이야기를 언제나 관심 있게 보시고는 했다. 어머니는 이런 이야기들을 대하시면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며 남의 일 같지 않다고 하셨다. 내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남봉 원정대원이라는 것도 신문을 보시고는 아셨다. 하필이면 히말라야 가겠다고 말씀드릴 즈음에 몇 달 동안 온 나라가 앞선 세 등반대의 연이은 비극적 산 이야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예상한 일이지만 원정에 앞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어머니가 가지실 걱정과 만류였다. 어머니께서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눈물을 보이시며 너무도 애절하게 만류하시던 날, 할 수없이 원정을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어머니 뜻을 따르겠다고 말씀드렸다. 어차피 어머니의 걱정하심을 모른 체하고 만류를 쉽게 뿌리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마음을 추스르며 원정대 일을 도왔다. 큰 산을 원정하게 된 우리 팀을 돕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었다. 

  

다짐하여라

그 이후 며칠 뒤 어느 날, 어머니는 나를 다시 불러 앉혀 놓고는 편안한 얼굴을 하시고는 말문을 여셨다.“얘야, 너 그 히말라야라고 하는 산에 가거라”라고 하셨다. 너무도 뜻밖의 말씀에 오히려 나는 당혹스럽기만 하였다. 어머니는 이어서 “네가 히말라야에 가지 못해서 응어리를 갖고 사는 것을 보느니, 네가 히말라야에 간 뒤에 내가 고통 받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구나”하시면서는 두 가지를 다짐하라 하신다. 첫 다짐은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그리고 또 하나는 “히말라야 같은 산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다짐하여라.”어머니는 내가 서슴없이“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 할 수밖에 없는 쉬운 다짐을 받아 내시며 나를 편하게 해 주셨다. 그리고 당신은 말로 표현 못할 마음고난을 택하셨다. 나는 원정을 허락하시는 어머니 심정을 헤아리며 한동안 마음 편치 아니 하였다.

  

고난의 등반, 그 나날들

’81년 8월 24일, 히말라야 원정길에 오른 우리는 그해 9월 17일 안나푸르나의 모디꼴라 빙하 깊숙이 자리한 내원, 해발 4,090m 지점에 베이스캠프(B.C)를 설치하였다. 본격적인 고소 등반을 시작한 이후 큰 눈사태를 맞았고 나와 대원들이 눈 속에 묻히지 않음은 기적중의 기적이었다. 히말라야 등반사에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눈사태 발굴 작업으로 묻혔던 식량, 장비를 극적으로 찾아내었다. 가혹한 눈사태 시련의 고비를 넘어선 우리에게 안나푸르나의 신은 또 다시 시험에 들게 하였다. 맞은편 산에서 트렉킹 등반 중이던 한국인의 조난 소식을 접하여 누군가 그를 구조하러 가야만 했다. 나는 등반도중 하산해 빙하건너 그 산에 올라 생사를 건 구조를 하였다. 나는 이 갑작스런 구조 활동으로 안나푸르나 남봉 등반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으나 극적으로 한사람의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 새 생명을 얻은 이분은 훗날 자신의 생환 과정을 수기로 발표하였다. 이글은 4대 일간지에 속하는 신문사 월간지의 수기 공모에 당선되어 일등상을 받게 된다.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나의 구조 활동이 끝날 즈음에 우리 원정대는 안나푸르나 남봉의 등정에 성공한다. 이 산을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등정한 것이다. 한국의 히말라야 원정사에서 네 번째의 등정 성공이며 사상자 없이 돌아왔다. 결국 이 등반에서 나는 운명적인 구조 활동으로 등정의 기회를 잃었지만 어머니와의 다짐을 지킬 수 있었다. 살아서 온 것이다. 한국에 가을이 깊어진 그해 11월 13일, 우리 원정대는 큰 산의 해외원정은 희생이 따른다는 전례를 깨고 돌아왔다. 김포공항에 내리던 날 수많은 환영인파와 매스컴의 취재카메라에 둘러 싸였다. 신문방송은 해외 등반의 연이은 비극에 마침표를 찍었다며 전과는 다른 극적요소에 초점을 맞춰댄다. 공항의 환영행사 중 한 중년의 여자가 겹겹이 쌓인 사람들을 거친 몸짓으로 뚫고는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화환을 목에 두른 나의 온 몸을 빠르게 살피고 더듬어 내려간다. 눈에는 이슬이 흥건하게 맺혀있다. 고교, 대학시절 산행에서 돌아와 집에 들어서면 내 몸을 살피시던 바로 그 모습이시다. 자식이 무사함을 확인하시고는 어머니는 다시 사람들 속으로 사라 지셨다.  

어머니는 자식이 히말라야 원정에서 돌아와 제 방의 침대에 누워 자는 것을 보는 날까지 한없는 맘고생을 하며 그 넉 달을 보내셨다. 어머니에게는 참으로 길었던 그 여러 날, 집에서 한참을 떨어진 근교의 산사(山寺)를 매일 같이 찾으셨다. 그 산사에서 당신 무릎이 법당의 마룻바닥처럼 굳은살이 박이도록 절하고 또 절하셨다. 수천 번 아니 수만 번이나. 그 몹쓸 놈의 아들이 당신에게 약속한 다짐 중에서 한 가지만은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원하셨다. 무사히 돌아온다는 그 다짐을 지키게 해달라고.   

원정에서 돌아온 며칠 뒤 누이가 내게 말하였다. 내가 히말라야 간 4개월 동안 어머니께서는 매일 밤을 잠 못 이루며 수면제에 의존하셨다고 한다.

 

떠나가신 어머니

그로부터 6년이 지난 ’87년 어느 따뜻한 봄날, 어머니께서는 56세의 짧은 생(生)을 살고 떠나 가셨다. 몹쓸 놈의 암덩이를 가슴에 안으시고는…. 어머니 가슴에 들어앉은 그 몹쓸 놈은 항상 제 생각만 하며 사는 자식 놈이 안겨드린 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머니 돌아가시고 두어 달이 지난 ’87년 그 해 여름날. 그 철없던 아들놈은 카라코람 히말라야 원정을 위한 입산허가신청서를 파키스탄 관광성에 제출한다. 그리고는 원정대를 꾸린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신들린 놈과도 같이, 아니 분명 신들린 놈이다. 마치 제 어머니 돌아가시길 기다린 놈처럼. 지금 대학원생인 딸아이가 세살 때이다. 이런 내 모습을 본 집사람이 어머니께서 생전(生前)에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셨단다. “그 애는 언젠가 또 위험한 산에 간다고 할 것이다. 그때는 내가 겪었던 모든 것이 너의 몫이구나.” 어머니는 모든 걸 예견하고 계셨다. 당신 사후(死後)에도 철들지 아니할 아들놈이 벌릴 일까지도. 

  

나는 다시 히말라야로

어머니 돌아가신 뒤 불효자의 가슴에 숨어 있던 히말라야의 불씨가 살아났다. 불씨는 순식간에 열정(熱情)으로 바뀌었다. 저 같은 무리들은 열정이라고 하겠으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열병(熱病)이 도진 놈으로 보인다. ’87년 말 주한 파키스탄대사관을 경유하여 파키스탄 관광성으로부터 입산허가를 받았다. 나는 ’89년도 카라코람 히말라야 가셔브룸2봉(Gasherbrum2:8,035m) 원정대의 대장으로서 두 번째 히말라야 원정길에 올랐다.

 

신들의 신

이순(耳順)이 멀지 않은 성상에 다시금 옛일을 돌아보니 어머니는 참으로 신과 같은 분이시다. 아니 나에게 어머니는 신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 그 이상의 분이시다. 생전의 어머니는 불교인이셨다. 나는 어려서 어머니 손을 잡고 절에 다니며 불교적 정서를 몸에 익혔다. ’81년 안나푸르나 남봉 원정에서는 네팔인과 셰르파들의 깊이 있는 불심을 대하고는 외경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89년 가셔브룸2봉 원정당시는 등반대를 도와주는 파키스탄의 이슬람교인들과 석달 가량을 같이 지냈다. 그들의 신앙심에 역시나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의 아내는 오랜 기독교인이다. 늦은 나이 미시간주립대에서 공부할 때에는 주일날 집사람을 따라 미국의 교회에도 가보았다. 그곳에서 참된 크리스찬들의 종교행사도 경험했다. 이런 저런 삶의 배경과 연륜에 의해 신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공부 할 수 있었다. 불경과 성경 그리고 코오란에 대해서.  

그럼에도 나에게 아직 신앙은 없다. 내 안에는 너무나 큰 신, 신들의 신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 나의 어머니! 내게 당신은 신들의 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