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9-19 17:52
상영형을 그리며 1
 글쓴이 : 기러기
조회 : 3,253  

 형을 마지막 본 것이 벌써 9년 전입니다.

 제가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서 빙모상을 치루던 날, 우연히도 형은 같은 층에서 고모님 상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전에 뵌 것은 여느해 5월 명륜동 체육대회 일겁니다.

 근간 일산에서 하시는 일 때문에 두문불출하신다는 말만 듣고는 한번 찾아뵙지 못 한 것이 못내 후회스럽습니다.

 산악부에서 처음 본 형의 모습은 돗수높은 안경과 흰 피부가 인상적이었지요. 곱게 자란 서울 범생이 같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등반이론에 관해서도 누구보다 학구적이셨습니다. 

  대학산악부 시절 형의 집은 성북동이었지요. 우리가 가면 어머니께서는 장국에 국수를 말아 주시곤 했지요. 그때 형은 침실 겸 장비실로 개조한 다락방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보물처럼 정리된 이런 저런 등반장비를 보여 주시며 해박한 산 지식으로 아우들의 등산관에 깊이를 더해 주었지요. 형은 로맨티스트였습니다. 다락방에서 커피원두를 손 그라인더로 갈아서 포에브스 버너에 코펠을 얹어 커피를 끓여 주셨지요. 

 등반중 산에서 음식을 만들 때는 엄중하면서도 자상하셨습니다. 산이니까 대충 적당히 조리해 먹자는 주의에는 철퇴를 내리셨죠. 그리고는 당신께서 손수 시범을 보이시며 산 요리 강좌를 하셨지요. 형이 식사 준비를 도와 줄때는 신참들은 취사 의무감 보다는 산행의 즐거움을 느끼곤 했지요. 형이 아우들을 대하는 방식은 늘 그랬습니다. 그 시절 형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75년 8월 설악산 하계등반 어느날,
 형이 복학해 5학년, 제가 2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형과 나는 1학년 두 명을 데리고 한조가 되어 곡백운 계곡으로 들어가 서북능에 오른뒤 안산암장으로 향하기로 했지요. 비가 추슬 추슬 내리고 운무가 심했던 그날, 독도하느라 무척 애를 먹었고 모두는 심한 하이포써미아 증세를 견뎌내야만 했지요. 서북능에 올라서야 우리가 감투골로 올라선 것을 알게 되었지요. 여름철 우천시 설악에서 있음직한 운행상 오류였습니다.

 이일을 두고 형은 한동안 많이 우울해 하셨지요. 계획된 루트에서 벗어남을 자책하며 예견되는 악천후에 사전 더 준비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해 9월 가을 일요일, 
 빗속에 선인봉을 선등하던 제가 박쥐날개에서 허공을 날라 헬멧 쓴  머리로 바위를 박았지요. 저는 병원에서 깨어났고 가벼운 찰과상에 그쳤으나 심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지요. 형이 제게 한 동안은 바위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운악산 단풍으로 마음 치유를 하자며 가벼운 산행을 동반해 주셨지요. 형이 아니었다면 저는 오랫동안 트라우마를 지워내지 못하고 암벽등반을 멀리 했을 것입니다.

 형은 묵직한 산악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주셨지요.
 그 시절 어느날, 산악부 중참이 되어서도 이런 저런 감이 없는 한 친구를 인수 서면슬랩에 데리고 가셔서는 개인지도를 하셨지요. 그 친구가 슬립하여 허공에서 땅으로 질주하는 것을 형은 정석대로 제동하였지요. 순간 형의 양손이 아작, 아니 작살이 나고 말았지요. 잠시만 제동이 늦었어도 그 친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안전지대로 내려온 후, 여러모로 개념이 없어 보이던 그 친구에게 제가 핀잔을 주었지요. 
 큰 화상으로 양손에 붕대를 감은 형은 저를 따로 부르시더니 “한 테두리에서 모자라는 사람일수록 감싸 줘야한다”고 조용히 타이르셨지요. 저는 자성하며 이후 작은 인격이나마 갖추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시절 그 친구는 형의 빈소에 끝내 보이질 않았습니다. 제가 그 친구를 또 핀잔하면 아마도 형은 제게 이렇게 말하실겁니다. 

 “내가 죽었는데 그 친구가 못오는 것을 보니 분명 무슨 일이 있을게야. 알아보고 위로해 주게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