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6-22 12:34
조선왕릉이야기(3) ~ 왕릉의 구조2
 글쓴이 : 오성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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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례공간은 금천교부터 설명합니다.

9. 금천교

  밖에서 볼 때는 금할 禁자를 쓰는 禁川橋, 안에서 볼 때는 비단錦자를 쓰는 錦川橋의 두가지를 동시에 사용한다. 왕릉을 들어서기 위한 첫 관문은 금천교라는 다리에서부터 시작된다. 물을 건너면서 안좋은 것들을 씻어 버린다는 의미가 있다. 禁川은 단어 뜻대로 건너가는 것을 금하는 시내라는 뜻이며, 금천교 건너편은 특별한 장소로써 왕의 영혼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표현한 것으로 물이 흐르지 않는 곳에도 설치하여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부분이다. 금천교는 궁궐의 금천교를 따른 것이다. 즉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제례를 모시는 경우에만 출입이 허용되었다고 보면 된다.

  땅에 붙어 있는 금천교의 바닥 판석은 짝수인 6개 혹은 8개의 돌을 사용 하여 “음”을 나타내며, 하늘을 향하는 홍살문의 홍살은 홀수로써 “양”을 나타내어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 참고로 “음양오행설”의 음양은 좋고 나쁜 개념이 아닌 대비와 조화의 개념이다. 예를 들어 사각형은 음, 원형은 양으로 나타내기도 하고, 문짝은 양‧ 문틀은 음이라는 식의 개념이다. 금천교 네 귀퉁이에는 돌이 밀려나지 않도록 돌기둥을 박아 놓아 약간 위로 튀어나와 있다. 특이한 형태로 융건릉의 사도세자 융릉의 금천교인 원대황교(元大皇橋)는 다리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금천교는 궁궐서도 같은 개념으로 사용한다. 금천교는 훼손되어 없어진 곳도 많이 있다.

10. 홍살문

  왕릉의 출입문으로 왕릉의 영역임을 나타내는 홍살문은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 지붕없이 살만 박혀있다.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알리면서 나무기둥과 살에는 사악한 기를 내쫒는다는 붉은 칠을 하였다. 또한 홍살문은 홍전 문(紅箭門)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백성들이 화살 '전(箭)'자를 '살'로 발음 하여 홍살문이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홍살의 수는 홍살문마다 다르며 양수인 홀수로써 9개‧ 11개․ 13개등으로 양을 나타낸다. 중앙에는 홍살 2개가 태극 모양 있는 곳을 지나면서 위에는 3개가 됩니다만 1개로 칩니다. 홍살문 중에 홍살의 수가 9개인 것이 가장 많은데, 그 이유는 9가 완성된 수라 하여 가장 좋은 숫자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태조 건원릉의 홍살은 9개이다. 동구릉의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홍살이 19개인 폭이 넓은 홍살문이 있는데 이 곳의 홍살의 갯수는 입구의 넓이에 따라서 갯수를 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홍살 중앙에 태극이 있다. 태극 문양의 3태극은 하늘․ 땅․ 사람을 의미한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는 하늘과 땅과 사람의 순리인 천지인사상을 중요시하는 유교정신에 따라 나라를 이끌어가겠다는 뜻으로 태극문양을 왕실 상징무늬 중의 하나로 선택하고, 충효와 학문의 상징으로 귀하게 여겼다 그런 사유로 태극무늬는 왕실과 관계있는 궁궐․ 왕릉․ 종묘와 같은 건축물 또는 왕실과 관련이 있는 장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 창경궁의 명정전과 홍화문․ 창덕궁의 돈화문과 대조전․ 경복궁의 근정전과 강녕전등에 태극문양이 있다

  태극은 우주 자연의 궁극적인 생성원리를 상징하며 적색은 존귀(尊貴)와 양(陽)을 의미하고, 청색은 희망과 음(陰)을 나타낸다. 즉 음양이론이 태극 속에 들어있다.

참고로 왕릉은 문화재청 산하 능지구관리소(13개소)에서 관리를 하지만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효종대왕의 녕릉(寧陵)은 박정희대통 령 시절에 성역화사업을 하면서 세종대왕 유적관리소로 분리(1977년), 격상 되어 다른 곳에 비해서 유적지 보존 관리가 엄격히 되고 있다. 하지만 영릉에는 조선시대 왕릉 묘제와 다르게 복원된 것이 여러 곳 있다.

10. 배위(拜位)

  홍살문 바로 오른쪽에는 가로․세로 2 미터 정도의 면적에 전돌이 깔린 곳이 있다. 이것은 왕이 제례(祭禮)시에 홍살문 앞에 내려서 절을 하고 들어가는 곳으로 배위(拜位) 또는 판위라고 합니다. 그리고 배위는 납작한 돌인 박석으로 깔려 있어야 하지만 전돌을 깔아 복원한 곳이 있다.

11. 참도(參道)

 참도는 홍살문부터 제례를 지내는 정자각까지의 길로써 납작한 돌인 박 석(薄石)이 깔려 있다. 참도는 왼쪽이 오른쪽 보다 넓으며, 높이가 약간 높은 신도(神道 : 영혼이 다니는 길, 신로)와 오른쪽의 임금이 다니는 길인 어도(御道, 인로人路))의 두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왕릉을 답사할 때 참도로 함부로 다니지 않는게 좋겠지요. 광릉은 참도가 훼손되어 없다. 여주 영릉의 참도는 복원과정에서 잘못된 부분이 있다. 신도의 양옆에 어도가 두개인 점은 잘못 되었다. 어도가 두개인 경우는 황제의 릉에 해당되는 묘제이기 때문이다. 또 잘못된 점은 바닥에 박석을 얼기설기 깔아야 하는데, 잘 다듬어진 사각의 돌을 사용한 것도 잘못된 것 같다. 복원과정에서 학문적 고증이 부족하지 않았나 사료된다.

 

  사족 : 박석고개의 유래

홍제동에서 불광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이 조선시대부터“박석고개”로 불렸다. 바닥에 박석을 깔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박석은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도 깔려 있는 돌이다.

박석은 화강암 재질에 절리형태 균열이 생겨서 두께 방향으로 잘 쪼개 지는 돌이다. 문화재청은 박석의 산지를 찾기 위한 노력 끝에 2004년 11월 인천시 강화군“석모도”가 조선궁궐에 쓰이던 박석의 산지라고 발표했다. 조선시대 지리책인 “신증동국여지승람”등 옛 문헌에 “강화도 매도(煤島)에 박석이 많아 나라에 공급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글쓴이 기억에 예전 온돌바닥의 구들장에 사용하던 박석도 석모도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구들장이 필요없지요! 50여년 전에 석모도에 석수가 100여명 이 넘었다고 한다.

12. 정자각

  참도를 따라 가면 제례를 치루는 정자각(丁字閣)에 도달한다. 왕릉의 중심 건물인 정자각은 형태가 '장정 정(丁)'자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정자각이라고 하며, 전체적으로 붉은 색을 띄고 있다. 후기에는 일자각도 나타난다.

정자각의 대부분 크기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 정도인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점점 커지는 경향이 있다. 좌우로 한 칸씩 더 있는 것(위 좌측 사진)을 날개 익자를 써서 익랑(翼廊)이라고 부른다. 익랑이 있는 곳은 당연히 앞부분도 2칸이 아닌 3칸으로 다른 곳에 비해서 정자각이 크다.

  조선조 왕릉 정자각의 지붕형태는 대부분 맞배지붕이다. 예외가 한 곳 있는데 동구릉에 있는 제18대 현종 숭릉의 정자각은 팔작지붕이다. 왕릉‧ 사당등은 엄숙하고 단아한 느낌을 주는 맞배지붕으로 짓고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 무량수전등이나 궁궐은 화려하고 장엄한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정자각은 제례를 지낼 때 내부에 제례 음식을 차리고 모든 의식을 진행하는 곳으로, 민묘의 상석(床石)과 같은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곳이다. 왕릉의 이해1의 글 앞부분에서 혼유석을 상석이라고 표현한 틀린 책들이 있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부분이다. 혼유석은 영혼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설치한다. 정자각 바닥은 사각형 전돌이 깔려 있다. 그 위에 신위를 모시는 신어평상(神御平床)‧ 제상(祭床)․ 향상(香床)‧ 촉대상(燭臺床)․ 축상(祝床) 등을 둔다.

위의 제상․ 향상등의 색상은 두가지인데, 황색은 황제의 능에 사용한 색상이며, 붉은 색은 제후의 색으로 왕릉에 사용했다. 황제로 승하한 순종의 유릉과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황제로 추존된 황제릉은 황색을 사용하였다.

  정자각을 오르는 계단도 신계와 어계로 구분한다. 신도에서 연결되어 오르는 왼쪽 계단을 신계(神階), 어도에서 연결되어 왕이나 제관들이 오르는 오른쪽 계단은 동계(東階)라고 합니다. 신계의 소맷돌 양 옆에는 구름((雲文)과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소맷돌 맨 아래의 고석에 새겨진 태극 문양은 대부분 3 태극이지만 건원릉의 2태극, 건릉의 4태극도 있다. 태극이 아닌 다른 문양이 새겨진 능으로는 정릉도 있다.

  여주의 영릉과 녕릉은 동계가 신계 양 옆으로 되어 있는데 “능제”에 어긋나는 점이다. 이것도 복원과정에서 능제에 따르지 않다고 보여진다. 정자각 왼쪽(서쪽)으로는 내려가는 계단은 하나 뿐인데, 이는 제례가 끝나면 임금이나 제관들이 내려 가는 계단으로 서계(西階)라고 합니다. 신(영혼)은 능침으로 바로 가기 때문에 나가는 길은 계단이 필요없다고 한다.

서계는 제관이 예감으로 내려갈 때도 사용하며, 사당이나 사묘에서도 동입서출(東入西出)의 법도를 따른다. 황제의 능인 홍유릉의 유릉은 능제가  달라서 그런지 조선조 왕릉의 정자각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13. 비각 ‧ 수라간 ‧ 수복간 ‧ 예감 ‧ 망료위 ‧ 산신석등

  정자각 동쪽에는 왕과 왕비의 일대기가 적힌 비(碑)를 안치한 비각(碑 閣)이 있다. 또한, 비각 아래 쪽에는 부속건물들인 수복방․ 수라간‧ 재실등 이 있었으나 훼손되어 터만 남은 곳이 대부분이며, 수복방은 복원된 곳이 여러 곳 있다. 수복방(守僕房)은 능지기가 머무는 방으로 정자각 오른쪽 비각 아래 쪽에 있고 건원릉등 복원된 곳이 있다.

 수라간은 제례음식을 차리는 곳이 아니고 밖에서 준비한 음식을 잠시 보관하는 장소이다. 여주 세종대왕 영릉의 수라간은 30여년 전에 복원되었으며, 화성 융건릉의 융릉과 건릉 수라간은 10여년 전 복원되었다.

 산신석(山神石)은 정자각 북동쪽인 오른쪽 위에 위치하고 제례가 끝난 후 산신에게 제를 올리는 곳으로, 민초들은 산신에게 먼저 제를 올리지만,왕은 서열이 산신보다 높으므로 왕에 대한 제례 후 산신에게 제를 올리는 점이 다르다.

  예감과 소전대(燒錢臺)는 정자각 왼쪽 위에 위치하고, 제례의 마지막 절차인 축문을 태우거나 태운 재를 묻는 곳으로 불교의 태우는 문화와 유교의 묻는 문화의 차이로 보여 지며 조선 초기와 후기의 능제의 차이점이다.

  망료위(望燎位) : 망료위는 정자각에서 제례를 끝낸 후 축문을 올려 놓는 곳이다.

재실(齋室)은 능참봉과 관리인이 머무는 곳으로 왕릉이 조성되면 재실을 짓고 종9품 능참봉 1명과 능관리인을 70명씩을 배치했다고 한다. 훼손된 곳도 있으나 보존된 곳은 대부분 문화재청 산하 왕릉관리사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여주 녕릉의 재실은 330년이나 되었고 보존도 잘되어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두산세계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