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8-02-19 11:37
|
글쓴이 :
김혁중
 조회 : 3,202
|
08년 2월 동계산행 후기
작성자 : 김 혁 중 ( 48 기 )
disclaimer :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서 독백투로 쓰게 됬습니다.
프롤로그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2월은 겨울의 후반부이기 때문에 산의 눈은 추위와 함께 녹아 내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빙벽등반과 워킹등반 중에서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면 난 워킹등반을 택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워킹조로 편성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명흠이 형 께서 설악산에서도 엄청난 눈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경험해보지 않은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선배님들께서 말씀하셨던 동계산행의 여러가지 고난들을 흘려버린 채로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난 미시령으로 향하고 있었다.
1. 미시령 ~ 점심시간
철조망을 넘어서 가야 한다는게 좀 당황스러웠다. 철조망 너머로 그저 새 하얀 산이 보였다. 눈이 얼마나 쌓인건지 가늠할 수가 없다. 동시에 걱정도 쌓여만 간다. 알 수 없던 자신감으로 불타오르던 내 정신은 육체가 느끼는 추위에 차츰 식어가고 얼어 붙기 시작한다. 철조망을 넘고 첫 발을 내디는 순간 내 발은 하염 없이 아래로 꺼져만 간다. 내가 딛는 곳은 땅이 아니다. 이대로 내 몸이 저 아래로 묻혀 버릴 것만 같다. 그리고 한 발을 더 내딛었다.
조금 전 보다 더 당황스럽다. 내 가슴까지 눈 속에 묻혀 버렸다. 적응할 새도 없이 현실은 냉혹하게 다가왔다. 눈 속에 묻혀있는 내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물리적 힘 만으로는 여기서 절대 나갈 수 없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의 힘으로 이 곳을 나가야 한다. 하지만 나에게 이런 경험은 처음이기 때문에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한다. 발을 딛기전 4번 정도 눈을 다져보고 가보고, 그냥 묻혀버린 다음 뒤로 몸을 눕혀서 빠져나와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을 취해봐도 내가 눈 속에 빠져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명흠이형께서 러셀을 하시고 뒤에서 준곤이 형님과 상국형님이 계시니까 정말 든든하다. 그 분들이 안계시면 난 이곳에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정신 없이 난 앞으로만 나가고 있다. 뒤에는 용준이가 있기 때문에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 하려 무지 애쓰고 있지만 사실 난 정말 정신 줄이 놓아진 상태이다. 이 엄청난 눈을 헤쳐나가는게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산행 시작한지 2 시간도 채 안된 것 같은데, 내가 느끼는 상대적인 시간은 6 시간을 훌쩍 넘어섰다.
2. 점심시간 ~ 너덜지대
아침에 황태해장국을 남김 없이 먹어 치웠건만 너무 배고프다. 떡라면을 끓여먹는데 맛을 느낄 새가 없다. 그냥 마구마구 먹었다. 그냥 엎어지면 눈, 뒤로 자빠져도 눈, 옆으로 슬쩍 해도 눈, 눈이 뵈이는 것도 모두 눈이라 물이 따로 필요 없다. 무식한 나는 그래도 혹시 몰라서 물을 가져갔건만 그것은 모두 허사였다.
눈이 쌓여있는 오르막을 하염 없이 오르다 보니, 저기 앞에 너덜지대가 보였다. 간만에 보는 눈 없는 돌무지 지대이다. 이곳이 더 가기 쉽겠다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중요한 부분에는 눈이 쌓여 있기 마련이었다. 피켈로 쿡쿡 찔러보고 지나가려 해보지만 잘못 밟으면 발 뿐만 아니라 몸도 자연이 만들어 놓은 함정에 빠져버리게 되었다. 내 플라스틱 이중화를 크게 신뢰하지 못했기에 거의 기어가듯이 이 너덜지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나에 비하면 형님들은 이 곳을 무척이나 즐겁게 통과하고 계셨다. 바위를 사뿐히 밟고 지나다니시는 것은 석상비(石上飛)의 경지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산에서 바위 사이사이를 자유자재로 지나다니는 기술이 없다면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용준이와 나는 평범한 인간에 해당하기 때문에 돌 위에서 그저 해맬 뿐이다.
3. 너덜지대 ~ 1318봉
너덜지대를 2개 지나가니까 1318봉이 나온다. 1318 봉에서 쌓여있는 눈을 한 주먹 먹는데 꽤나 맛있다. 설악산 1318봉 맛 아이스크림을 출시해도 될 듯 하다. (지금은 줘도 안먹을듯 하다.) 다음엔 설탕을 가져와서 눈에 설탕 찍어먹어 보고 싶다. 행동식들이 정말 꿀맛 같다. 행동식을 두둑하게 챙겨왔어야 하는건데, 간당간당 해서 정말 후회된다. 다음에는 행동식을 비롯해서 모든 장비를 철저하게 챙겨야 겠다.
하루 종일 걸었는데 이제 겨우 1318봉이라는게 정말 허탈하다. 실망감은 절망감을 낳고 이 절망감은 내 배낭위에 쌓여 더한 무게감을 준다.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이제 겨우 이만큼 걸어 왔는데 내일은 어느 정도 걸어 갈 수 있을까. 과연 백담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앞으로 내가 가야하는 길은 어떨지 감도 안 잡힌다.
4. 1318봉 ~ 제 1 야영지
서서히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다. 점점 추워지면서 몸이 눈 속에 빠질 때 마다 짜증이 더해간다. 빨리 텐트치고 오늘 일정을 마무리 하고 싶다. 게다가 발이 너무 시렵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은 플라스틱 이중화가 작아서 그런건지, 추워서 그런건지 통증이 점점 심해져만 간다. 피가 통하는 느낌이 없고 제대로 위아래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다행히 명흠이 형님이 적당한 야영지를 찾으셨다. 빨리 그곳에 텐트를 치고 쉬고 싶은 생각 뿐이다. 배고프고 춥고 아픈 것이 이보다 최악일 순 없을 듯 하다.
5. 제 1 야영지
하루 종일 걸었는데 야영지는 지도상으론 미시령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실망스럽지만 어쩔 수가 없다. 해가 지고 나면 정말 위험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준곤 형님과 상국 형님께서 건너편 텐트에서 국을 끓이신다. 텐트 설치가 정말 빠르시다. 역시 세월에서 우러나오는 경험의 힘이 정말 중요하다. 경험을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난 딱히 하는 것이 없다. 원래는 내가 일을 도맡아 하려고 애를 쓰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그저 용준이에게 미안하기만 하다. 저녁을 먹는 순간 힘든 것이 싹 가신다. 거기에 술 한 잔 들어가니깐 견딜만 하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이 힘든 산에서 벗어나고픈 생각 뿐 이었는데 그래도 조금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하루 만에 이렇게 인간이 변하는 것을 보면 정말 인간은 간사한 동물이다. 밥을 먹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담소를 나누는 그 순간이 오늘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인 듯 하다. 이제 두 다리 쭉 뻗고 자는 일만 남았다. 중간에 깨지 않고 그냥 푹 자고 싶다. 내일은 오늘 보다 더 힘들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걸어도 백담사 입구로 가지 못할 수도 있다.
* skkuac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2-19 15:5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