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경태의 주문에 따라 우량폭포와 관련한 보완 설명(고증및회고)을 드립니다.
우리 산악부가 최초로 빙벽을 접하게 된 시기와 장소는 1969년 12월 구곡폭포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당시 우리산악부 대장단(한상국 ,이명수/3학년))의 후배육성의 깊은 배려 덕분으로 한국산악회에서 개설한 "등산 아카데미" (요즈음 등산학교의 전신)과정(1969.12~1970.02)에 당시 2학년인 한영우,최준곤이 입교 하게되어 그 교육과정 중 작고하신 원로 산악인 김정태 선생의 빙벽을 사사케 되었습니다.
그해(1970년 12월) 동계등반(설악산) 준비차 부실(천문대)에서 분주하게 장비손질을 하고 있는데 이규태(2학년)가
헐레벌떡 달려와 흥분된 어조로 " 포천에 갔다오는 길에 버스차창으로 산중턱에 '하얀 비단자락'이 드리워진 폭포를 보았다" .... "한번 가 보았으면 좋겠다." 는 제안에 따라 다음날 그와 함께 짐을 꾸려 "하얀비단자락"의 현장을 확인하고 마침 계획중이 었던 동계등반 (설악산) 예비훈련의 적지로 체택을 하게 되었읍니다.
년말을 넘기고 1971년 1월초 동계등반 예비훈련차 전부원이 다시 "하얀 비단자락" 언저리에 켐프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빙벽훈련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빙벽기술과 장비로는 매우 원시적인 수준으로 아이젠의 경우 8 발짜리가 고작이었으며 시중에는 casin,tani등의 수입제품과 국산제품(모래내산)이 판매되고 있었으나 가난한 우리산악부는 부잣집아들 (유민수?)한명정도 반듯한 수입제품을 소유하고 있었을 뿐 나머지는 자작품 ( 윤보용선배의 감독하에 청계천에서 철판 사다가 기계공학과 실습실에서 열처리, 제단 ,용접,연마 공정을 거처 스스로 만든-- 지금은 골동품이 되어 산악문화회관 산악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당시에는 "프렌치,저먼 태크닉" 이나'프론트 포인팅'이란 용어 자체도 알지 못하였고 오로지 '스텝커팅'이 기술의 전부였으며 그밖의 기본기로 "백스탭--요즘용어로는 삐올레 라마쓰" 도 있었습니다.
훈련2일차에 이혜석(3학년)이 김원영(1학년/금속공학과)을 데리고 폭포 중단까지 "스텝커팅"으로 올라가 "백스텝"
기본교육(시범과 실습)후 자습에 열중 하던 김원영의 무딘 아이젠 잇빨(points)이 그의 육중한 체중에 어설픈 자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균형을 잃는 순간 바닥(약 40m)까지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떨어지는 순간 "혀~엉"이란 외마디 보고의 격식은 갖추고....퍽-소리와 함께 얼음바닥에 널부러진 김원형은 실신상태였고 반사적으로 확인한 호흡은 지속되고 있었으며 두껍게 입은 스톰파카와 냅색 덕분인지 외상은 전혀 없고 입술 언저리에 짜장면 국물과도 흡사한 굵은 핏줄기가 늘어져 있을 뿐이였습니다.
(김원영은 당시 산악부 최고 미남형 얼굴과 우람한 체구의 소유자로 스스로 소개한 자신의 별명을 '우량아'라고 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사고에 겁먹은 우리들은 다음날로 훈련을 접고 철수하였으나 동계등반을 마치고 그해 2월 말에 다시 4명의 특공대를 결성하여 폭포인근의 三佛寺를 베이스켐프로 하고 이틀간의 사투(?)끝에 우량폭을 완등 하게 되었습니다.
완등 대원에 우량아 김원영은 물론 포함 되었으며 그후 김원영의 대형사고(?)와 완등을 기념코자 "하얀비단자락"의
"무지치폭포"를 우리산악부에서는 우량아 김원영의 별명을 따서 "우량폭포"로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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