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6-22 12:57
조선왕릉이야기(4)~ 왕릉얘기
 글쓴이 : 오성대감
조회 : 3,939  

1. 조선 한양의 위치를 누가 추천했는가?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등진 동향으로 추천하고, 하륜은 현재의 연희동인 무

악산 밑을 추천했지만, 백악산 밑을 추천한 정도전의 (안)으로 결정됐다.
 

2. 왕릉은 왜 한양 근처에 많이 있는가?

  임금이 며칠씩 궁궐을 비울 경우 역모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하루

에 궁궐로 돌아올 수 있는 거리를 “왕릉은 80리 이내”로 국법으로 정하였다.

조선의 10리는 약 5.2Km이므로 현재 척도법으로 약42Km인 100리 정도이다.

3. 80리 초과하는 왕릉이 있는 이유는?

  (1) 영월의 단종 장릉(엄숙할 장자 장릉) : 폐위되어 죽은 후 복위됨.

  (2) 여주의 세종 영릉과 효종 녕릉 : 풍수가 너무 좋아 “뱃길로 하루에 도성

      인 한양에 도착할 수 
있다”라는 논리로 80리를 넘겼다.

  (3) 수원 융․ 건릉 : 조선조 왕들 중 풍수에 밝았던 임금은 세조와 정조이다.

      정조는 화성과 아버지인 사도세자(장조)의 융․건릉
을 만들면서 “지금부

     터 수원은 한양에서 80리 이다”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래서 융건릉은 80

      리 이내에 포함되는 것이다 

  (4) 개성에 있는 제릉과 후릉 : 그 당시의 도읍은 개성이었다.



4. 흉당 자리는?

  (1) 수렴 : 물이 나오는 자리

  (2) 충렴 : 벌레가 생기는 자리

  (3) 군영 : 살기가 도는 자리

  (4) 파묘 자리 : 남의 무덤 자리

  (5) 도시혈 : 지각변동으로 시신을 잃어버리는 자리.

5. 명당과 흉당에 얽힌 이야기.

 ① 정조는 자신의 생부인 사도세자를 죽인 할아버지 영조에 대한 원한이 있

   었다. 그런 정조의 생각을 모르는 어느 대신이 “영조가 생전에 정한 신후지

   지(身後之地)인 서오릉에 있는 정비 정성왕후 서씨 홍릉의 오른쪽 에 모셔

  야 한다”고 했다가 귀양을 가고 끝내 목숨까지 잃었다. 영조 왕릉은 동구릉

  원릉으로 효종의 파묘자리인 것이다. 뼈에 사무친 원한이었다.

 

  ② 세종의 영릉 터는 원래 어느 이씨 문중의 묘를 쓴 곳이었으며, 그 터를

   잡은 지관이 이씨 문중 후손들에게 “절대로 재실이나 사당을 짓지 말라, 만

   약 이 말을 어긴다면 좋은 터라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라고 부탁했

   으나, 후손들은 그 말을 지키지 않았다. 그 후 어느 지관이 그 곳에서 비를

   피한 후 그 곳이 천하의 명당자리인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그 터는 세

   종의 영릉이 되었다.

    어! 파묘자리는 흉당인데?

   민간인은 5자를 초과하는 깊이로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고 10자 깊이로 묘

  를 쓰는 것은 역모죄로 다스렸다. 법으로 정한 이유는 “풍수의 왕기는 10자

  깊이로 흐른다”는 사유이며, 영릉의 터는 파묘자리이지만 왕기에는 영향이 

  없다고 하여 왕릉이 됐다.

 

  ③ 세종 왕릉은 처음에는 아버지인 태종의 헌릉에 가까이 있고자 태종 옆

   에 왕릉을 썼다. 물이 많이 나오는 흉당이었다. 명당터인 영릉 위치가 발견

   되어 영릉자리로 천장되었다. (일반인은 이장이라 하고, 왕릉은 천장이라

  한다)

6. 왕릉이 명당이라면 왜 혈육간의 죽음이나, 폐위되거나 반정이 일어나고 자

   식을 죽이는 등의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나?

   아무리 명당터일지라도 동기감응(또는 부자감응)으로 그 터에 해당되는 사

   람에게 해당되며, 적덕사상이 있어야 한다.
 
  위 두가지 내용이 풍수의 핵심이론이다. 예를 들어 경주 최부자 집의 흉년

  에는 땅을 사지 말라, 주변 백리이내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는 등의 적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스

  개 소리로 시신을 모시는 좌향(座向)을 의도적으로 정확하지 않게 틀리는

   방향으로 잡아 이씨왕조에 나쁜 영향을 끼치게 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근거

   없다고 사료된다.

7. 국장의 주무 관청은?

  국상이 생기면 국조오례를 담당하는 예조의 주관으로 빈전을 설치하고, 임

  시관청인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이 설치된다. 산릉도감은 대부

  분  공조판서가 담당한다.

8. 국장기간은?

  석달이며 그 기간 동안 냉장보관을 위한 조치가 취해진다. 즉, 동빙고에서

  보관되던 얼음과 대나무로써 사각형태의 설빙을 만들고 그 안에 돌아가신

  분을 모신다. 건조미역을 이용하여 계속 발생하는 습기를 제거했는데 바로

  “국장미역”이다. 왕의 수의는 습에 9벌,소렴에 19겹, 대렴은 90겹이라는 기

  록이 있다.

  참고로 서빙고는 수랏간에 사용하는 얼음을 보관하는 곳이다. 얼음도 이처

 럼 음양을 따져 격을 가렸던 것이다. 농경시대인 조선에서 소는 중요한 재산

 으로 함부로 잡지 못하고, 어떤 때는 금살령으로 도살을 금지했지만 국장기

  갈비집이 많거나 수원의 떡갈비의 유래도 정조의 융건릉 행차와 관계가 있

  다.

9. 왕의 위치는 오른쪽일까 왼쪽일까?

  양택에서는 주인기준으로 좌상우하이지만, 음택에서는 반대로 우상좌하이

  다. 이 기준은 능의 주인 기준이니 능을 바라보는 방향으로는 좌상우하이

  다. 궁궐이나 왕릉은 주인기준으로 방향을 따져야 하고 사찰은 부처님 기준

  으로 방향을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서오릉에 있는 영조 정비 정성왕후 서씨 홍릉은 오른쪽이 비어

  있다. 우허제(右虛)라고 한다. 흉당터에서 얘기했듯이 영조의 생전의 생각

   원릉에 계비인 정순왕후와 쌍릉으로 모셔지며 홍릉은 오른쪽이 비어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는 합장릉인 세종 영릉 비각에는 “조선국 세종대왕 영릉

  소현왕후 부좌(附左)”라고 되어 있다. 즉 소현왕후의 위치는 세종대왕의 왼

  쪽이다.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분과의 방향이 틀리다. 좌의정이 높나, 우의

  정이 높나? 좌의정이 높다.

9. 왕릉 형태의 구분

조선왕릉은 단릉‧ 쌍릉‧ 합장릉‧ 동원이강릉‧ 삼연릉‧ 상하릉이 있다.

(1) 단릉

  왕이나 왕비인 정비와 계비를 따로따로 모신 능으로 15개 있다. 왕의 단 릉

  은 태조 동구릉 건원릉
과 단종 영월 장릉(莊陵)과 선정릉 중종 정릉뿐 이다.
  나머지는 왕비의 단릉이다.

(2) 쌍릉

  봉분이 두 개인 능으로 태종 헌릉과 동구릉 영조 원릉등 9개 있다.

(3) 합장릉

  봉분 하나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것으로 여주 세종 영릉과 인조 장릉(長

  陵), 고종 홍릉, 순종
  유릉(왕과 정비,계비 3인 합장) 등 8개 있다. 합장릉의
 혼유석은 두개 또는 세개로 단릉과 구별
된다.

(4) 동원이강릉(同園異岡陵)

  한자 뜻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 같은 지역의 다른 언덕에 왕 과

  왕비를 따로 모셨다.  

  세조 광릉과 성종 선릉, 선조 목릉등 7개 있다. 그중 숙종은 정비 인현왕후

  민씨와 명릉이 쌍릉이
며, 계비 인원왕후 김 씨와 동원이강릉이다. 봉분은

  두 개이지만 정자각은 하나이며, 하나의 왕
릉으로 본다.,

(5) 상하릉

  여주 효종 영릉과 경종 의릉의 2개가 있다.

(6) 삼연릉

   동구릉 헌종 경릉에 왕과 정비, 계비 3인이 삼연릉으로 되어 있다.

※ 참고

(1) 장릉은 3개 있다. 영월 단종 장릉, 인조 장릉(長陵), 추존 왕인 김포 원종

    장릉(章陵)이다

(2) 중종은 정비,계비 2인등 모두 다른 곳에 있다.

    중종은 선정릉의 정릉, 정비인 단경왕후 신씨는 영조15년에 복위되며 경

   기도 장흥과 송추사이
에 있는 온릉, 계비 장경왕후 윤씨 희릉은 서삼릉에,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는 태릉에 각각 모셔
져 있다. 이유는 아마도 정치역

  학적인 점이 아닌가 한다.

10. 조선의 통치이념은 유교인데, 왜 “풍수”가 중요했는가?

  조선의 통치 이념은 유학이 분명하지만 왕족이나 양반들 모두 풍수를 유 학

  과 더불어 중요시 했
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낮에는 유학, 밤에는 풍수 라고
  할 정도로 중요했다.

11. 풍수란?

   풍수지리는?

   장풍(바람을 막고), 득수(물을 얻어) 땅을 보는 이론이 풍수이다.

   조선 왕릉과 다른 왕조의 왕릉과 가장 큰 차이는?

  풍수에 의한 왕릉 조성이었으므로 풍수의 “생기(생명지기)”를 어떻게 받느

  냐가 가장 중요한 점이다. 생기는 태조산인 백두산에서부터 흘러 온다. 동

   구릉을 예로 든다면 백두산으로부터 한북정맥의 종산인 백운산을 거쳐 소

   조산인 불암산과 주산인 검암산으로 해서 동구릉으로 이어진는 것이다.

   그러면 왕릉의 구체적인 부분은?

   생기가 많이 있는 곳이 바로 “강(岡, 언덕)”이다. 조선 왕릉은 모두 “강”위

   에 있다. 이점이 다른 왕조의 왕릉과 가장 틀린 점이다. “강”에 생기를 불

   어 넣는 길이 바로 “잉(孕, 아이밸 잉)이다. 풍수에서는 잉이 혈을 만들기

   때문에 혈증(血證)이라고 한다. 잉은 곡장 바로 뒤의 얕으면서 약간 위로

   돋아 올라온 부분이다. 결론은 ”잉이 없는 조선 왕릉은 없다“

12. 동9릉과 서5릉, 서3릉, 파주3릉?

  한양에서 시신이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은 광희문(시구문)과 서소문 뿐

  이지만 국상의 경우 4대문을 통과할 수 있다. 동쪽의 흥인지문으로 나가는

  능은 동○릉, 서쪽의 돈의문으로 나가면 서○릉으로 불렀다. 항상 홀수 이

  다. 이유는 음양오행의 양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의 문화를 이해하는

  점에서 음양오행과 풍수는 필수이다.

  

     왜 동구릉에서 서쪽으로 왕릉이 바뀌었을까?

정답은 세조임금이다. 세조는 정조와 더불어 임금 중 풍수에 가장 밝었던 임

금으로 알려져 있다. 세조는 동구릉으로 오는 “왕기”를 중간에 차단하여 서

쪽으로 흐르게 하여, 형님인 문종의 후손이 아닌 자신의 직계 후손에게 왕기

가 흐르게 하려고 자신의 묘를 지금의 광릉에 정했다고 한다.

풍수에서는 생기가 흐르는 산맥을 “용”으로 표현한다. 2012년 정부발표에

의하면 “용”자가 들어간 지명이 전국에 12,000여개로 가장 많다고 한다. 서오

릉 앞의 지명은 “용두동”이고, 근처에 “용원”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용

미리”가 있다. 바로 세조와 연관된 지명이다.

  또 세조에 의해 능제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석실을 쓰지 말고 회다짐으

로 하라. 그 이유는 빨리 자연으로 돌아가서 후손을 도와주겠다는 뜻이 다.

이 회다짐은 조선 말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도굴사건 때에 알려지기도 했

다. 병풍석도 쓰지마라는 세조의 어명도 같은 이유이다. 시기적으로 태조 건

원릉을 조성한 사람은 고려말의 궁궐과 왕릉을 조성한 박자청이며 그 영향으

로 고려의 영향이 많었지만 세조 이후의 왕릉은 고려와 차이가 생기기 시작

했다.

   후대 왕릉 중에 병풍석이 있는데?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의 목릉과 병자호란을 겪은 인조의 장릉, 사도세자로

알려진 장조의 융릉에는 병풍석이 있다. 세조의 어명이 있었지만 생전에 외

적과 남에게 고통을 받은 왕으로 사후에는 편안하게 지내라는 후손들의 염원

이 아닐까 한다.

13. 삼릉공원?

   선릉역 근처의 왕릉을  “삼릉공원”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위 내용으로 보

면 절대로 잘못된 표현이다. 선릉은 봉분은 3개이지만 성종과 왕비의 동원이

강릉이고, 중종의 정릉이 있으므로 왕릉은 2개이다. 그러면 이릉공원이 맞

나? 음양오행에 따라 짝수를 왕릉에 쓰지 않으므로 그냥 “선정릉공원”이라

부르는게 맞지 않나 한다

14. 후기

   조선왕릉에 대하여 깊은 학문적 지식이 없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동안

본인이 배웠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했습니다. 몇회에 걸친 내용으로 자세하

게 알기는 부족하지만 이 정도를 이해하면 왕릉답사를 가도 눈에 보이는 것

이 많을 것입니다. 답사에 관한 말에 “초보자는 아는 만큼 보이고, 경험자는

보는 만큼 알게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답사는 사전에 자료에서 반이상 하

는 것이고 현장에서 확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왕릉마다 차이점도 많습니

다. 그런 부분은 각자 답사를 하면서 찾아낼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