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6-22 12:18
국보1호, 사적1호의 불편한 진실
 글쓴이 : 오성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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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보물․ 사적 ‘1호’에 숨은 불편한 진실

2002년에 발표된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의 논문 ‘근대 한․일 양국의 성곽인식과 일본의 조선 식민지 정책’ 을 보면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철거하려 했다는 내용이 있다. 1905년 을사조약 후 조선 점령군 사령관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그런 낡아빠진 (남대)문은 파괴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제는 용산을 중심으로 40만 ~50만명 규모의 신도시 건설계획을 세웠다. 남대문을 우수한 문화재라기 보다는 내선일체의 걸림돌로 여긴 것이다. 이 때 일본거류민단장이던 나카이기타로(中井喜太郞)가 “남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입성한 문이다. 파괴해서는 안된다. 동대문 역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입성했다”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즉, 일본의 승전기념물이라는 의미를 부여해서 철거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일본과 아무런 인연이 없던 서대문인 돈의문은 1915년 철거되고 말았다.

 

1934년 조선총독부는 관보를 통해 지정문화재 169건을 고시했다.

‘보물1호 경성 남대문, 보물2호 경성 동대문... 고적1호 경주 포석정지....’

국보는 없었다. 보물과 고적․ 천연기념물뿐이었다.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에 국보는 없다는 논리였고, 그 속뜻에는 아마도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자신들의 전승기념물이기 때문에 제1호와 2호의 가장 앞부분에 놓지 않았나 사료된다.

‘고적1호“ 포석정? ‘927년 11월 경애왕이 나라가 망하는데도 술판을 벌이다 견훤의 침략군을 맞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망국의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의문점이 있다. 아무리 정신나간 임금이라도 망국의 누란 지경에서, 그것도 음력 11월이면 지금 달력으로 한겨울에 해당하는데 추운 때 밖에서 물도 꽁꽁 얼었을텐데, 노천에서 술을? 포석정은 실제 술을 먹고 놀던 유희공간이었을까? ‘화랑세기’에 포석정(停)이 아니라, ‘포석사(祠)’로 나온다. ‘화랑의 종주’인 문노(文努‧ 8대 풍월주‧ 재임579~582)의 화상을 모신 사당이었다는 것이다. 나라의 안녕을 빌던.... 경애왕은 술판을 벌인 것이 아니라 천년 사직의 유지를 기원하다가 후백제군의 습격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일제는 사당인 포석사를 포석정이라는 유희공간으로 둔갑시키고 국왕이 술마시며 놀다 나라가 망한 열등민족이니까 너희는 영원한 식민지로 살 수밖에 없는 민족이라는 억지 주장을 만들어 우리민족을 폄하하려 했다고 사료된다.

 

국보‧ 보물‧ 사적의 1호라는 속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은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할 때도 일제의 만행이 여과되지 않고 “그냥” 답습됐다는 것이다. 다만 일제 때 정한 보물을 국보와 보물로 나누었을 뿐, 번호를 부여했다. 국보1호 숭례문, 보물1호 흥인지문, 사적1호 포석정....이 됐다. 문화재의 가치나 의미와 중요도가 아닌 관리하는 순서 순으로 편의상 붙인 번호일 뿐이라는 논리와 함께!. 왜 이런 걸까. 상당히 불편한 진실일 뿐이다.